2023 4 30 특별 주제 설교: 상처

교회는 기관이 아닙니다.
유기적이고 살아있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몸의 각 지체들이 제각각 움직이면 정상적인 몸을 이룰 수 없듯이
모든 지체들은 머리 되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가 온전히 하나 되는데 있어
가장 큰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일까요?

다름 아닌 ‘사람’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 하면, 각 사람 안에 있는 ‘상처’들 때문에 교회가 하나 되기가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는
-크리스천은 상처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크리스천은 상처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이 ‘상처’라는 주제를 놓고 말씀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

직장이나 학교, 교회를 막론하고 여러 사람들과 관계를 맺다 보면,
참 다양한 증세(?)를 가진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엄마, 아빠 얘기만 나오면 치를 떠는 아이들도 있고
-집이 가난한 것도 아닌데 자꾸 도둑질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거짓말을 습관처럼 하는 사람이 있기도 합니다.

-그 밖에도 별 것 아닌 일에 쉽게 폭발하여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드는 사람,
-분노를 격하게 표현하지는 않지만 사람을 무시하고 상대를 아예 하지 않는 등의 행동으로 감정을 표현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타인에게만 그런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항상 스스로를 정당화 하고 있을 뿐,
나 역시 남들이 보기에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에서 폭발하고 토라지기도 하며,
평소에는 멀쩡한 듯 하나 특정 상황에서는 너무도 비상식적으로 반응하기도 하는, 굉장히 이상한 사람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모든 사람과 상황을 대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타인을 아프게 하고 공동체를 하나되지 못하게 만드는 이런 이상 증세들은 스스로의 의지로 고치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 증상에는 당연히 ‘원인’이 있습니다.
이 원인을 정확히 알면 치료가 가능합니다.

다만 우리가 주의해야 할 부분은,
이러한 문제 증상의 원인을 바라보는 완전히 상반된 ‘두 가지 생각’이 있다는 겁니다.

(로마서 8:5 – 6)
5.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6.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 로마서 본문 말씀에 따르면
동일한 현상을 바라볼 때, 누군가는 ‘육적‘으로 생각하고 누군가는 ‘영적’으로 생각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육을 따르는 사람, 다시 말하면 세상에 속한 사람은
내 안 좋은 성격이나 악한 습관, 반복되는 죄성이 발견될 때 ‘육신의 일들’을 생각하면서 그 원인을 세상에서 찾는다는 겁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겪는 ‘육신의 사건’들은 다음과 같을 것입니다.
-부모와의 관계에서 좋지 않았던 일들.
-배우자와의 관계에서 좋지 않았던 일들.
-시어머니, 시댁과의 관계에서 좋지 않았던 일들.
-이전에 섬기던 교회 공동체 안에서 좋지 않았던 일들.
-어렸을 때, 재정이 너무 어려워서 좋지 않았던 일들.
-회사나 학교, 사회생활 하면서 겪었던 좋지 않았던 일 등…


스스로가 생각하기에 부정적이던 과거의 모든 사건들을 끄집어내고
이 경험들을 ‘상처’라 정의하며 나의 이상한 반응들을 합리화 합니다.

-> ‘나에게는 이런 상처가 있기 때문에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야.’
‘누구라도 이런 상처를 경험했다면 나와 같은 행동을 할 수 밖에 없을거야.’
-와 같이 말이지요.

우리는 본능적으로 ‘상처’라는 개념에 호의적입니다.
‘상처’라는 핑계 뒤에 숨으면 마음이 너무나도 편안해지거든요.

‘상처’라는 표현에는
지금 나에게 있는 모든 문제는 다~ 남의 탓이다.
나에게 상처를 주었던 그 사람과 환경의 탓이다!
-라는 속 뜻이 숨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똑같은 현상을 바라보는 또 다른 시선이 있습니다.

(로마서 8:5)
5. 육신을 따르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을 따르는 자는 영의 일을 생각하나니>

-> 문제의 원인을 세상에서 찾지 않고 ’영적‘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인생의 문제의 원인을 ‘상처’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여러분 성경에서 이런 구절 읽어보신 적 있으십니까?
-모세가 어린 시절 엄마에게 버림 받았던 상처로 사람을 죽이게 되었으니..
-다윗이 어린 시절 부모에게 인정 받지 못한 상처 때문에 밧세바를 범하게 되었으니..
-가롯 유다가 리더십에 대한 상처가 있어 예수를 배신하매..

아마도 이런 말씀은 한 번도 접해보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성경은 결코 ‘상처’를 이야기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모든 문제의 원인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야고보서 3:14 – 16)
14.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
15.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땅 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니
16.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

-> 야고보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상처 때문에 발현된다고 믿었던 증세들-시기와 다툼, 거짓과 교만과 정욕의 원인이 귀신의 것, 즉 영적인 문제에 있다고 이야기 합니다.

우리가 오늘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상처‘는 영적인 본질을 보지 못하게 하려는 원수의 거짓말이라는 사실입니다.

원수는 항상 우리로 하여금 상처에 집중하게 만듭니다.
문제의 주체를 나에게 상처를 준 ‘그 사람(환경)’으로 보게 하는 겁니다.

-나에게 상처준 배우자.
-나에게 상처 준 부모.
-나에게 상처를 준 공동체..

여러분! 사람을 보지 마세요.
육신의 일들을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 끝은 사망이라고 하나님은 경고하십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 땅에서, 사람과의 관계에서 어떤 사건이 있었고
어떤 상처를 서로 주고 받았는지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허락된 일은 오직 ’영의 일들 만을 생각하는 것’ 뿐입니다.
우리에게 영적으로 어떤 사건이 있었습니까?

(마태복음 18:21 – 27)
21. 그 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23. 그러므로 천국은 그 종들과 결산하려 하던 어떤 임금과 같으니
24.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
(만 달란트=약 25조 원. 대를 이어도 못 갚는 상징적 금액)
25.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26.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27.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 이것이 우리에게 있었던 영적인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영적으로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이었습니다.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도무지 갚을 수 없는 ‘죄의 빚’을 졌던 것입니다.

우리가 지은 가장 큰 죄는 ‘살인죄’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님의 하나 밖에 없는 독생자를, 외아들을 죽인 살인자들입니다.

누군가가 내 외동딸, 외아들을 죽이면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놀랍게도 우리는 그 죄를 용서 받은 겁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18:28 – 35)
28. 그(빚을 탕감 받은)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백 데나리온: 약 천만 원~2천만 원 정도의 가치)
29.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30.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31. 그 동료들이 그것을 보고 몹시 딱하게 여겨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알리니
32. 이에 주인이 그를 불러다가 말하되 악한 종아 네가 빌기에 내가 네 빚을 전부 탕감하여 주었거늘
33.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료를 불쌍히 여김이 마땅하지 아니하냐 하고
34. 주인이 노하여 그 빚을 다 갚도록 그를 옥졸들에게 넘기니라

35.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 백 데나리온은 약 천 만원 정도의 가치가 있다고 합니다. 결코 적지 않은 금액이지요.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받은 상처의 크기가 결코 작다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그 어떤 사람이 나에게 아무리 심한 말을 하고 아무리 못할 짓을 했어도
내가 하나님께 탕감 받은 죄의 크기를 생각한다면 용서하지 못 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영원한 생명과 평안을 누리를 비결이 여기에 있습니다.
지금부터는 사람 간에 있었던 일들에 집중하지 마세요.
오직 하나님과 나 사이에 있었던 ‘영의 일’만 생각하십시오.

성경은 우리를 ‘사랑에 빚진 자’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서 굳이 이런 부담스러운 표현을 쓰신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반드시! 의무감을 가지고 너희는 서로 사랑하고 용서 하라는 겁니다.
주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 사랑과 용서는 선택이나 마음의 감동 차원의 문제가 아닙니다.
법적인 의무사항입니다.

오늘부터 매일 사랑의 빚을 갚아나가는 결단이 있길 축원합니다.
나에게 상처 주었던 사람을 마음으로 용서하고 그에게 복음의 메시지를 전하세요.
바로 지금, 문자나 편지를 통해 사랑과 축복을 계속해서 전하십시오.

사랑할 수 없는 자를 사랑하고,
용서할 수 없는 자를 용서함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영적 의무를 다하는 충성된 교회 되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

우리가 ’상처‘라는 표현에 현혹되면 발생할 수 있는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바로, <영적인 눈이 가리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상처라는 말에 내가 지배 당하게 되면
상처가 될만한 어려운 상황과 관계들을 자꾸만 피하게 됩니다.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해 어려움으로부터 자꾸만 달아나려고 합니다.
당연하겠지요. 뭐하러 상처를 찾아다니면서 받겠습니까?

그래서 공동체 안에 자꾸 나에게 어려움을 주는 사람이 있을때,
이 어려움을 ‘상처’라고 규정해 버리잖아요? 할 수 있는 일은 딱 3가지입니다.
1) 나에게 상처를 주는 그 사람을 왕따를 시켜서 쫒아 내보내던가
2) 내가 그 공동체를 떠나던가
3) 그냥 없는 사람 취급하고 상대를 안해버리던가. 이게 전부입니다.

나에게 상처를 준 사람을 떠나가면 인생이 편안해질 것 같지요?
아니요. 희안합니다! 결국 똑같은 사람을 또 만나게 됩니다.

공동체도 마찬가지예요. 내가 어떤 교회 공동체에 상처를 받고 나왔어요.
그렇게 다른 교회 가면 더 나은 신앙생활이 열릴 것 같지 않습니까?

아닙니다. 그 지긋지긋했던 교회와 굉장히 유사한 형태의 공동체로 결국 다시 부르십니다.
혹은, 이동한 공동체 안에서도 비슷한 아픔이 또 반복됩니다.

왜 그럴까요?

(야고보서 3:14 – 16)
14.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
15.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땅 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니>
16.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

야고보의 가르침대로 우리 일상에서 겪는 모든 어려움과 아픔 들은 그 원인이 성격과 기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적인 부분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 영적인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보고 오늘 설교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우리의 고난과 상처가 크다 한들
성경에 기록된 믿음의 조상들과 비교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모세는 말도 못하던 어린 시절에 어머니께 버림을 받고 원수의 나라 계모 손에 자랐습니다.
-사무엘도 젖을 뗀 직후 엄마와 애착관계..그런 거 없이, 바로 생이별 하여 성전에서 반 고아와 같이 성장합니다.
-요셉은 친형들에게 노예로 팔려가는 끔찍한 배신을 당합니다.
-다니엘도 나라가 망해서 적국에 끌려가 이름까지 빼앗기고 내시가 되어서 예배할 자유마저 박탈당합니다.
-다윗도 아무 죄 없이 사울에게 몇 번을 죽을 고비를 넘기고 쫒겨납니다.

현대 정신의학이나 상담학에서는 이들이 겪은 고난을
정상적인 생활이 어려울 정도의 ‘큰 상처’로 진단할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인생의 고난을 우리와 같이 ‘상처’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시편 119:71 – 73)
71.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72. 주의 입의 법이 내게는 천천 금은보다 좋으니이다
73. 주의 손이 나를 만들고 세우셨사오니 내가 깨달아 주의 계명들을 배우게 하소서

-> 성경은 고난을 ‘상처’가 아니라 ‘유익’이라고 말합니다.
고난이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가르침’이라고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모세가 어린 시절 버려지고, 장인의 집에 얹혀사는 수치와 고난을 경험했기에
겸손하고 낮아지는 성품을 배울 수 있었고, 결국 민족의 영도자로 부르심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요셉도 마찬가지입니다.
형들에게 팔리는 고난을 통해 모든 것들을 용서하는 마음을 배웠고,
감옥과 같은 소망 없는 곳에서도 하나님의 계획을 발견하며 최선을 다하는 능력이 완성 될 수 있었습니다.

그 훈련의 과정을 통해 결국 노예 요셉은 애굽의 총리로 부르심 받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고난은 상처가 아닙니다.
<부르심의 시작>이고, <나를 완성하는 연단의 과정>입니다

그래서 세상 엄마들은 우리 자녀들에게 최대한 상처를 주지 않고 키우려고 노력하지만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에게 어려움을 주는 것에 굉장히 관대하십니다.
상처 주는 것에 어려워 하지 않으십니다.

그 인생 안에서 상처와 고난이 크면 클수록
부르심과 영광의 크기가 더욱 커지기 때문입니다.

[마무리]
오늘 이 말씀을 새기고 또 새겨서
내 삶의 지표로 삼으시는 결단이 있길 간절히 축원합니다.

이제 여러분들은 이 땅에서 천국을 경험하고,
어떤 원수의 공격이나 삶의 어려움 가운데서도 더욱 기뻐하는 승리의 비결을 배우게 되신 겁니다.

더이상 과거의 어려웠던 경험, 그 아팠던 시간들을 ‘상처’라고 부르지 마세요.
그리고 그 어려운 상황이나 관계에서 달아나려고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내 삶에 어려움을 허락하셨다면,
그 어려움은 내 안에서 해결 되고 돌파 될 때까지 반복해서 찾아올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어려움은 상처가 아니라 ‘부르심’이고 ‘훈련’이며, ‘축복’이기 때문입니다.

———[마무리 기도 선포]————–]

+정리하겠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좋은 사람, 좋은 단체, 좋은 인연을 만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나에게 복을 가져다주는 좋은 사람,
나에게 상처를 주는 나쁜 사람이란 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과 나의 관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떠하냐에 따라 그 사람이 나에게 복이 되기도 하고
저주와 상처가 되기도 합니다.

다윗과 밧세바의 이야기가 이것을 증거합니다.
우리아의 아내였던 밧세바는 좋은 사람이었습니까? 나쁜 사람이었습니까?
성경은 밧세바라는 사람 자체가 악하거나 좋은 사람이었다고 정의하지 않습니다.

다윗의 마음이 교만해 지고, 하나님과의 거룩한 관계가 깨어진 상태에서 밧세바를 만나니,
그 밧세바는 다윗 가문, 즉 예수님의 생명의 계보를 끊는 최악의 관계가 됩니다.

그런데 다윗이 다시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해지니
그 똑같은 ‘밧세바’라는 관계를 통해서 인류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한
솔로몬이 태어납니다.

우리에게 상처를 주었던 과거의 그 사람과 그 사건들이 문제의 본질이 아니예요.
그 일들을 통해 우리를 거룩한 자녀로 완성시키고자 하는 하나님의 뜻이 본질인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 붙들고 함께 기도하기 원합니다.

——–마무리 기도——–

사랑이 많으신 주님 감사합니다.
오늘 우리의 작은 인생들이 주님의 위대한 증거가 되길 소망합니다.

요셉이 예수님의 예표가 될 수 있는 것은 총리가 되어서가 아닙니다.
자신을 팔아 넘기고 죽이려고까지 했던 형들의 죄를 모두 용서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위대한 예표로 하나님 역사 가운데 기록 될 수 있었듯이,

오늘 이 교회 안에 모든 상처들을 넉넉히 덮고 승리하는 예수의 권능이 부어지길 소망합니다.

모든 어려운 상황 속에서
육신의 일들과 상처들에 집중하지 아니하고,,
오직 주님만을 바라봄으로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을 사랑하고,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며
감사할 수 없는 상황 가운데 오직 감사하는

진정한 증인들 다~ 되게 하여 주옵소서.

모든 문제들 보다 크시며,
모든 상처들을 승리로 역전시키실 주님, 찬양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감사 기도 드렸습니다.

————-가정 예배—————

+주일 마다 나누어 드리는 설교 정리용지가 있습니다.
-양식에 맞추어 다음 내용을 가정 안에서 꼭 정리하는 시간을 가지세요.

1) 하나님께서 왜 이런 설교를 듣게 하셨을까?

2) 오늘 하나님의 말씀에서 절대 잊지 말아야 할 키워드는 무엇이었을까?

3) 내가 생각하는 설교의 결론은 무엇인가?

4) 이전에 잘못 알고 있던 부분이나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무엇이 있는가?

5) 이번 한 주, 나는 설교 말씀에 근거해서 어떤 새 일을 행할 것인가?

+) 특별히 이번 가정 예배 시간에는
나에게 아픔이 되었던 사건들을 하나하나 생각해 봅니다.
그리고 그 일들이 더이상 나를 누르는 상처가 아닌,
하나님께서 내게 허락하신 연단의 과정으로 바라봅니다.

– 그 아픔을 통해 내가 배운 것이 무엇이고,
– 영, 혼, 육의 각 부분들이 어떻게 단단해 졌는지,
– 그리고 이 경험을 앞으로 주님께서 어떻게 나의 무기로 사용하실지 가족과 함께 나누어 봅니다.

한 주간 주님께서 교회를 통해 선포하신 말씀을 굳건히 붙들고 승리하는 시간 누리시길 기도합니다.
진심으로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

ps. 주중에 1:1양육 시간이 있습니다.
가능한 시간을 내셔서 주일 설교에 대한 적용점과
신앙의 방향성을 체크하는 시간 가지시길 당부 드립니다.

원하시는 날짜 기준으로 1~2일 전에 제 개인 톡으로 말씀 주시면 시간 비워두도록 하겠습니다.
반드시 변화와 돌파의 경험을 누리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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