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렐루야.
이번 주도 함께 예배할 수 있어 행복했습니다.^^
주일 설교 요약하여 올려 드립니다.
잘 숙지하신 후에 가정 안에서 꼭 서로 설교하는 시간을 가지시길 축원합니다.
유튜브나 기타 신앙서적을 통해 남의 설교를 100번 듣는 것보다
내 입으로 말씀을 한 번 가르치고 선포할 때 더 큰 변화와 돌파가 일어납니다.
다음 주일은 모든 성도들이 분명한 변화와 선한 열매를 가지고 모이는 영광의 날이 될 것을 믿음으로 선포합니다!
(디모데전서 4:11 – 16)
11. 네가 이것들을 명하고 가르치라
12.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13.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라
14.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예언으로 말미암아 받은 것을 조심 없이 말며
15.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16.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삼가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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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크리스천들은 일상이 곧 영적 전쟁입니다.
적군은 때론 배우자와 자녀의 모습으로, 때론 재정의 어려움이라는 상황으로 다가와
우는 사자와 같이 우리의 평안과 하나님의 성품을 깨뜨리려 합니다.
하지만 두려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승리를 위해 ‘기도’라고 하는 무기를 쥐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기도의 진짜 능력은 내 아픈 감정을 쏟아내고 마음에 위로 정도 받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기도는나를 우겨싸고 있는 모든 상황을 역전시키고 최후 승리케 하는 실제적인 능력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를 정확히 배우고 깊이 연구해야 합니다.
기도하는 법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의 신앙생활은
군인이 총쏘는 법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상태로 전쟁에 나가는 것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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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는 왜 어렵게 느껴질까?]
가장 많이 접하고, 또한 모두가 잘 하기를 소망하지만
마음처럼 되지 않는 것이 ‘기도’인 것 같습니다.
기질적으로 말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도 기도만큼은 피하려고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언어’적인 부분이 굉장히 큰 장벽으로 작용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교회에서 개역개정으로 대표되는 ‘성경적 어투’로 신앙생활과 기도를 배워왔기 때문에 기도 역시 그러한 분위기로 해야 한다는 인식이 있습니다.
물론 옛날 어투로 기도를 하는 것이 잘못된 방법은 아니지만 새신자들이나 어린아이들이 처음 기도를 배우기 시작할 때 큰 부담으로 작용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성경과 같은 어투로 멋드러지게 기도하지 않으면 마치 내가 기도를 못 하는 사람인양 스스로 위축되기도 하고, 누군가가 내 기도를 유치하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걱정을 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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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처음 기도를 배울 때 가장 많이 참고하는 ‘주기도문’을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개역개정 성경에 기록된 주기도문은 역시 굉장히 수준 높고 어렵게 느껴집니다.
그 시작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시작부터 알 수 없는 거리감이 느껴집니다.
내가 도저히 손 닿을 수 없는 머나 먼 ‘하늘’에
무언가 권위적이고 거리감이 느껴지는 이름, ‘아버지’가 계신다고 합니다.
하지만 사실 개역개정 성경에 기록된 주기도문은 원어의 느낌을 잘 살리지 못한 번역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시에 직접 선포하신 기도는 결코 이런 느낌이 아니었습니다.
확신컨데 예수님의 주기도문을 들은 제자들은 아마도 깜짝 놀랐을 것입니다.
자신들이 그토록 기대했던 기적과 권능의 기도가
멋있기는 커녕 조금 유치하고 없어보이기까지 해서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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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당시 ‘아람어’라는 언어를 사용하셨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 아람어로 예수님은 기도를 이렇게 시작하십니다.
아분- 드바쉬 마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니트 카다-쉬 쉬마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티테 말쿠토쿠(ㅎ)
(나라이 임하시오며)
네흐웨 세비요노크(ㅎ)
(주님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에이카노 드바쉬 마요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
…
잘 접해보지 못한 언어, 거기다 무려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언어라고 하니
아람어는 우리에게 굉장히 권위 있고 신령하게 느껴지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당시 유대인들의 표준어는 우리가 잘 알다시피 ‘히브리어’였고
아람어는 사람들이 ‘선한 것이 나올 수가 없다’며 무시했던 나사렛과 가버나움 같은 초라한 지방 사투리였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투리로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사람을 구분할 수 있는 것처럼
예수님이나 베드로의 말투를 들으면 ‘아~ 지방 촌사람이구나~’ 라는 것을 단박에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에 이런 장면이 등장합니다.
(마태복음 26:69 – 71)
69. 베드로가 바깥 뜰에 앉았더니 한 여종이 나아와 가로되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70.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가로되 나는 네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노라 하며
71. 앞문까지 나아가니 다른 여종이 저를 보고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되 이 사람은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매
72.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73. 조금 후에 곁에 섰던 사람들이 나아와 베드로에게 이르되 너도 진실로 그 당이라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 하거늘
-> 사람들이 베드로의 ‘말투’(아람어 사투리)를 보고 예수님과 같은 지방 사람임을 확신한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이토록 지방색이 강한 사투리를 사용하셨기에
실제로 예수님이 읊으신 주기도문은 거룩하고 있어보이는 느낌보다는
(당시로써는) 누가 들어도 약간은 촌스러운 느낌이 강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말투만 촌스러웠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시에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놀라운 표현으로 기도를 시작하심으로
듣는 모든 이들을 충격에 빠뜨리십니다.
‘아분-‘
사전에 따르면 ‘아분’ 이란 단어는 아람어 ‘Abba’의 변형이며, 유다의 ‘어린이’들이 아버지를 부르던 말-이라 설명 되어 있습니다.
서른 살이 넘은 예수님께서 아무런 격의 없이 하나님을 향해 ‘아빠’라고 부른 것입니다.
당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 서기관 등 종교 지도자들은 사람이 많이 다니는 광장 중앙에 서서
손을 들고 멋들어진 기도문을 외우면서 자신의 영적 권위를 자랑하기 좋아했으나
예수님은 그런 종교적인 틀을 거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촌스러운 사투리와 ’아빠‘라는 유치한 단어로 기도를 시작하심으로,
‘얘들아! 기도는 어렵고 부담스러운 행위가 아니야!’
‘마치 어린 아이들이 아빠와 대화하듯 그저 자연스럽게 말하면 되는 거야!’
-라며 기도를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알려주신 기도는 결코 권위적이고 어려운 것이 아니었습니다.
가장 쉽고, 가장 자연스러우며, 가장 ‘나 다운‘ 언어의 고백이었던 것입니다.
[‘아빠’의 더 큰 의미]
그런데 ‘아빠’라는 말에 담겨있는 의미는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기도를 ‘아빠’로 시작하라고 가르치신 데는 더 큰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기도는 가장 먼저 <너희의 하늘 정체성을 선포하는 것>으로 시작하라는 것입니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우리가 자주 잊고 지내는 사실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은 내 DNA의 근원이 누구인지를 설명합니다.
우리는 죄악으로 똘똘뭉쳐 소망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마귀의 자식들이 아닙니다.
완전하신 하나님 아빠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가장 고귀하고 거룩한 ‘왕의 자녀’들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기도를 이 당당함과 벅찬 기쁨으로 시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구약시대의 기도-성막기도]
그런데 우리는 기쁨과 권능의 기도보다는 애통하는 기도가 더욱 익숙합니다.
물론 애통하는 기도, 회개와 눈물의 기도 역시 특별한 시즌에 주님께서 요구하시는 때가 분명히 있습니다.
하지만 내 평생 대부분의 기도가 항상 그런식이라면 예수님께서 새롭게 주신 기도의 가르침이 무색해질 수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왜 우리는 권능의 기도, 왕의 기도보다 애통하는 기도가 익숙해 졌을까요?
거기에는 여러가지 원인이 있을 수 있지만
오래 전부터 한국 교회 안에 유행 했던 기도의 한 기조가 있었습니다.
‘성막기도’라는 것입니다.
성막의 구조를 공부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말이 아닙니다.
사실 구약시대, 즉 율법의 시대에서는 성막에서 제사드리는 과정 자체가 기도의 순서였고
성막의 구조에 대해서 배운다는 것은 여호와의 속성을 이해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은혜와 성령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구약시대 성막의 구조를 내 삶을 이끌어 갈 기도의 기반으로 삼겠다는 것은 위험한 발상일 수 있습니다.
신앙적으로 좋지 못한 결과를 가져올 가능성이 굉장히 클 뿐더러 예수님의 뜻과도 어긋납니다.
성막의 구조는 다음과 같습니다.
(0) 입구
(1) 번제단
(2) 물두멍
(3) 성소
(4) 지성소
성막기도는 번제단과 물두멍 기도가 그 시작이 됩니다.
내가 죄인임을 고백하고 그 죄를 정결케 하여 주님 곁으로 나아 가는 개념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번제와 물두멍의 정결 의식을 치르고도 결코 주님의 임재(지성소) 앞으로는 나아갈 수 없습니다.
이것이 성막이 가진 구조적 한계입니다.
성막은 애시당초 인간으로 하여금 ‘여호와 앞에 가까이 나아오라’는 목적으로 계시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미 죄를 범한 인간은 어떠한 ‘회개의 의식’과 ‘정결의 행위’를 반복한다 해도
흠 없고 거룩하신 여호와께는 ‘결단코’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시는 장치,
완전하신 여호와와 죄 많은 인간 사이의 넘을 수 없는 ‘구분’을 상징하기 위한 장치가 바로 성막이었습니다.
그래서 구약시대의 사람들은 성막을 바라볼때마다
-어떠한 행위로도 영원히 가까이 뵐 수 없는 머나먼 하나님,
-작은 죄와 실수에도 가차 없이 벌하시는 심판의 하나님,
-그러면서도 내가 가는 곳마다 항상 짊어지고 다녀야 하는 무겁고 부담스러운 하나님을 항상 상기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율법의 저주를 십자가 위에서 깨뜨리시고
죄인의 옷을 입은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자녀’라는 새 신분과 권세를 주신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소원대로 우리의 기도는 달라져야 합니다.
율법의 시대에는 우리가 ‘죄인의 정체성’으로 기도를 시작했다고 한다면,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과 같이
아들의 정체성으로, 왕의 정체성으로 기도를 시작 해야 합니다.
스스로 바라보는 내 모습이 아직 죄스럽고 못미덥다 하더라도 괜찮습니다.
왕자의 옷에 진흙이 묻었다고 해서 그 정체성이 거지로 바뀌는 것이 아니듯,
나의 연약함과 부족함이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의 정체성은 결코 변할 수 없는 왕의 자녀임을 선포합니다!
이제부터 여러분은
먹고 사는 문제에만 급급한 걸인처럼 기도하지 마세요!
불필요한 정죄감에 빠져서 죄인처럼 기도하지도 마십시오!
아무데도 의지할 곳 없는 막막한 고아처럼 기도하지 말고!
세상의 모든 권세를 지닌 왕의 자녀 답게!
모든 죄악들이 다시는 우리의 삶 속에 틈 타지 못하도록 물리치십시오!
-나와 내 가정,
-내 사업의 재정들과
-이 나라와 민족과 우리 자녀들을 <불법적으로> 묶고 있는 어둠의 영들을 꾸짖어서 쫒아 내십시오!
-하나님이 이미 허락하신 축복을 막고 있는 모든 방해하는 영들을 향해 승리를 선포하십시오!
여러분은 예수님께 위임 받은 합법적인 권한이 있습니다.
힘내세요! 이미 승리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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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선포]
오늘 이 말씀 붙들고 기도하기 원합니다.
이미 은혜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는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른다는 것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지
개념적으로 잘 와닿질 않습니다.
이게 예수님 당시에는 얼마나 충격적인 일이었냐면,
예수님 시대에 가장 끔찍한 형벌이 바로 십자가형이었습니다.
사람이 물과 피를 쏟고 새들이 와서 눈을 파먹는 모든 고통을 죽는 순간까지 느껴야 하는,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최악의 형벌이기에 죄수 중에서도 가장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자가 당하는 형벌이 십자가 형이었는데,
예수님께서 이 형벌을 당하신 죄목 중에 하나가 ‘신성 모독이었습니다.
감히 여호와 하나님을 ‘아빠’라고 불렀기 떄문에 십자가에 매달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신 것은
편안하게 바위에 걸터 앉아서 고상하게 읊으신게 아니었어요.
주기도문은 예수님께서 목숨 걸고 가르쳐주신 기도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목숨 걸고 선포하신 왕의 정체성이기에
우리도 목숨 걸고 이 정체성을 지켜야 합니다.
왕의 자녀 답게! 살고!
왕의 자녀 답게! 기도해야 합니다.
자녀가 왕 답게 사는것이 아빠의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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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 예수님의 마음을 붙들고 함께 기도하기 원합니다.
예수님! 오늘 당신께서 목숨과 바꾸면서 까지 우리에게 가르치신
왕의 정체성이 이 교회 가운데 새겨지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가 지금까지 습관처럼 해왔던 기도의 수준을 넘어!
악한 영들을 꾸짖는 기도, 세상을 진동케 하는 기도의 새 지평이 열리기 원합니다.
이제는 죄인의 기도, 고아의 기도를 넘어,
세상의 모든 권세를 지닌 왕의 자녀 답게!
하늘의 권능을 선포하는 이 교회의 기도 되게 하옵소서!
왕의 정체성으로 기도하지 못하게 하는
모든 눌림과 정죄 두려움 들은 이 시간 아빠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묶임 받고 떠나갈 지어다!
우리는 왕의 자녀임을 선포하노라!
오늘 나와 이 교회의 입술을 통해,
하나님 아빠의 권능을 운반하는, 위대한 기도가 플어질 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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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 예배 양식]
+주일 마다 나누어 드리는 설교 정리용지가 있습니다.
-양식에 맞추어 다음 내용을 가정 안에서 꼭 정리하는 시간을 가지세요.
1) 하나님께서 왜 이런 설교를 듣게 하셨을까?
2) 오늘 하나님의 말씀에서 절대 잊지 말아야 할 키워드는 무엇이었을까?
3) 내가 생각하는 설교의 결론은 무엇인가?
4) 이전에 잘못 알고 있던 부분이나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무엇이 있는가?
5) 이번 한 주, 나는 설교 말씀에 근거해서 어떤 새 일을 행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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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주간 주님께서 교회를 통해 선포하신 말씀을 굳건히 붙들고 승리하는 시간 누리시길 기도합니다.
진심으로 사랑하고 축복합니다.^^
ps. 주중에 1:1양육 시간이 있습니다.
가능한 시간을 내셔서 주일 설교에 대한 적용점과
신앙의 방향성을 체크하는 시간 가지시길 당부 드립니다.
원하시는 날짜 기준으로 1~2일 전에 제 개인 톡으로 말씀 주시면 시간 비워두도록 하겠습니다.
반드시 변화와 돌파의 경험을 누리시길 축원합니다.